본문 바로가기

해외뉴스

“추기경의 고백, 교회의 침묵을 깨다 — 그러나 책임은 어디에 있나”

프랑스 가톨릭교회 성범죄 자백 사건이 던진 충격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또 한 번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가톨릭의 최고위 성직자 중 한 명인 **장 피에르 리카르(Jean-Pierre Ricard) 추기경(78)**이 자신이 35년 전 14세 소녀를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리카르 추기경은 2001년부터 2019년까지 보르도 대교구의 대주교를 지냈으며, 2006년에 추기경으로 임명, **2013년 교황 선출 회의(콘클라베)**에도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즉, 교황을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가톨릭의 최고 엘리트 중 엘리트’**였던 인물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와 신뢰 자체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과거 14세 소녀를 성적으로 학대한 사실을 인정한 프랑스의 장피에르 리카르 추기경 [사진 출처 : AFP=연합뉴스]

“35년 전 14세 소녀에게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

리카르 추기경은 프랑스 주교단 회의에서 발표한 성명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35년 전 14세 소녀에게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고, 그 결과 그 소녀에게 지금까지도 심대한 영향이 미치고 있다.”
“고통을 입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세속 사법 당국과 교회의 판단을 기다리겠다.”

이 발언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사실상 공개적으로 자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스스로 말문을 연 것은, 교회의 오랜 침묵과 은폐의 벽을 깨뜨린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사회와 가톨릭 신자들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법의 시효는 끝났고, 책임은 사라졌다

사건이 공개되자 프랑스 사법당국은 곧바로 예비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범행이 35년 전 일이라는 이유로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프랑스 검찰은 2023년 초 “법적 시효가 지나 형사처벌이 불가능하다”**며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즉, 그는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처벌을 전혀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서는 “고백이라는 이름의 기만”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사실상 법적 책임은 피하면서 ‘회개한 추기경’이라는 이미지만 남겼다는 것입니다.


교황청의 대응, 그러나 특권은 여전

교황청도 프랑스 검찰의 수사 종료를 지켜본 뒤 **교회 내부 조사(조사 프라에비아)**를 시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리카르 추기경은 현재 공적 직무 수행을 중단했으며, 교회법상 징계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실제로 그는 단지 5년 동안 사역 수행만 제한되었을 뿐, 추기경의 특권과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교황이 내세운 “성직자 성범죄에 무관용 원칙”이 말뿐인 선언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11명의 주교도 조사 중… 프랑스 교회의 깊은 병

리카르 추기경 사건과 함께, 프랑스의 전·현직 주교 11명이 과거의 성폭력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프랑스 주교회의 의장은 “교회 내 그 누구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가장 높은 지위의 추기경은 아직도 모든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가 여전히 폐쇄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조직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지 몇몇 신부의 일탈이 아니라, 교회의 구조 자체가 부패하고 썩었다는 증거로 해석됩니다.


에릭 드 물랭 보포르 프랑스 주교회의장이 아동 성 학대 독립조사위원회의 보고서 공개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70년간 21만 명 피해” — 끝없는 아동 성범죄의 그림자

2021년 **프랑스 가톨릭 성학대 독립조사위원회(CIASE)**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1950년 이후 70년 동안 프랑스 내에서 약 21만 6천 건의 아동 대상 성범죄가 성직자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단지 숫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인생이 **“하느님의 이름으로”**라는 말 아래 파괴되었다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겠다”, “반성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실질적인 변화나 책임자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리카르 추기경의 자백은 이런 ‘말뿐인 자정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입니다.


프랑스 사회의 분노와 피해자들의 외침

프랑스 사회는 이번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까지 은폐되어 왔는가”라며 분노했습니다.
특히 피해자들과 인권단체들은 공소시효 제도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피해자 지원 단체는 검찰이 수사를 종결하자 이렇게 반발했습니다.

“법적 시효 때문에 진실 규명이 좌절되는 것은 부조리하다.”

이 단체는 아동 성학대 사건의 공소시효 폐지 또는 연장을 요구하며,
“리카르 추기경 사건은 법의 허점을 드러낸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습니다.


도덕적 권위의 붕괴, 이제는 책임으로 응답해야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사람의 범죄 고백이 아닙니다.
이는 ‘도덕의 수호자’라 자처해 온 가톨릭교회의 근본적 신뢰 붕괴를 의미합니다.
성직자의 범죄가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인 은폐와 방조의 구조 속에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제 교회는 말이 아닌 실질적인 책임과 개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고백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정의와 치유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 결론

35년 전의 범죄를 뒤늦게 고백한 한 추기경의 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고백을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갈 것인가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변하려면,
“하느님 앞의 용서”가 아니라 “피해자 앞의 책임”을 먼저 져야 합니다.
프랑스 사회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요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