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아르헨티나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질서 회복”과 “반공(反共)”을 내세우며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것은 질서가 아니라 공포였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이어진 이른바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최소 13,000명, 많게는 30,000명에 이르는 시민이 납치, 고문, 살해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제는 이 비극의 현장에 종교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때로는 협력자였다는 의혹과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가톨릭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국가였다. 아르헨티나 주교회의와 주요 주교들은 쿠데타 직후 이를 공개적으로 환영하거나 최소한 인정했다. 그들은 “국가의 기독교적 가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동시에 바티칸 역시 냉전 속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며 남미 군부 정권에 대해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교회 지도부는 폭력을 “모두 규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부의 안보 정책에는 “이해를 표한다”는 모순된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명확한 비판이 아니라 사실상 동조였다.
하지만 모든 성직자가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엔리케 안겔렐리 주교를 비롯해 일부 신부와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인권을 옹호하다가 납치되거나 살해되었다. 문제는 교회 조직의 대응이었다. 개인은 희생됐지만, 조직은 움직이지 않았다.
1979년경, 주교들은 이미 정부가 조직적으로 시민들을 ‘실종’시키고 고문과 살해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 성명은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부를 약화시킬 수 없다.”
이 판단은 곧 선택이었다. 인권보다 이념을 택한 것이다.
이 비극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일부 성직자가 직접 범죄에 가담한 사례다.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 신부는 경찰의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며 비밀 구금소에 드나들었다. 그는 고해성사를 듣는 척하며 정보를 수집했고, 이를 군과 경찰에 넘겼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죽음으로 끌려갔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고문 현장에 동석했고, 피해자들에게 회개를 강요했으며, 죽기 직전 사람들에게 ‘최후 성사’를 집전했다. 이는 종교의 이름으로 공포를 강화한 행위였다.
결국 그는 2007년, 살인 7건·납치 42건·고문 31건 공모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가톨릭 사제가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첫 사례였다.
또 다른 비극은 1977년 ESMA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출신 수녀 2명과 봉사자 3명이 납치된 뒤 비행기에서 바다로 던져져 살해됐다. 이 사건은 ‘죽음의 비행’으로 불리며 세계적인 충격을 줬다. 그러나 교회 지도부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강하게 항의하지 않았다.
군사정권 기간 동안 교회 지도부의 태도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침묵이다.
1976년 쿠데타 직후 일부 주교들은 “질서 회복”에 대한 기대를 표현했고, 군부와 정기적으로 만났다. 바오로 6세 교황이 1978년 유엔에서 실종자 문제를 언급했지만, 현지 교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어가지 않았다.
1981년에야 주교회의는 처음으로 “인권 존중”을 언급했지만, 끝내 정부를 직접 비판하지는 않았다. 너무 늦었고, 너무 약했다.
독재가 끝난 뒤에도 문제는 계속됐다. 1995년 주교회의는 “더 단호히 말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인정했지만, 구조적 책임은 회피했다. 2007년 폰 베르니히의 유죄 판결 이후에도 교회는 “깊은 슬픔”과 “화해”를 강조했을 뿐이었다. 책임 인정 대신 봉합을 택한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2012년까지도 사제 신분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범죄는 개인의 일탈이라며 선을 긋는 태도는 오히려 조직적 책임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후 변화의 계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관련 바티칸 문서 공개를 지시하고, 교회 내부 연구를 승인했다. 2023년 보고서는 중요한 사실을 인정했다.
“주교들은 1979년에 이미 ‘실종 정책’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개 항의하지 않았다.”
이 문장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상 자백이다.
한편 피해자 가족들, 특히 ‘플라자 드 마요의 어머니들’은 오랫동안 외쳤다.
“우리는 신의 집에서도 정의를 듣지 못했다.”
이 말은 종교가 침묵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면 도덕적 권위를 잃는다.
둘째, 이념에 집착하면 인간의 기본 권리를 외면하게 된다.
셋째, 조직의 침묵은 개인의 양심을 압도한다.
넷째, 일부의 범죄를 방치하면 그것은 결국 구조적 책임이 된다.
다섯째, 진실을 외면하면 역사는 더 오래 고통받는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다.
“권력 앞에서 종교는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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