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사회를 뒤흔든 충격적인 보고서가 발표됐다. 벨기에 가톨릭교회의 성추행 사건을 조사해 온 아드리안센스 위원회가 공개한 조사 결과는 숫자만으로도 참담하다.
100여 명에 달하는 피해자 제보를 토대로 확인된 성직자 성추행 사례는 무려 475건. 그리고 그 피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최소 13명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드러났다.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어린 시절 신뢰했던 성직자에게 학대를 당한 기억 때문에 삶을 포기한 사람이 13명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조직이 외면한 결과다.

■ 200쪽 보고서에 담긴 124명의 증언
아드리안센스 위원회는 생존자 124명의 증언을 200쪽 분량에 담아 공개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10~12세 무렵, 믿고 따르던 사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 나이는 초등학생이다.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이다.
보고서에는 더 충격적인 사례도 있다. 2살 때부터 학대를 당한 경우, 그리고 4~5살부터 시작된 사례도 여러 건 확인됐다.
위원회 위원장 페터르 아드리안센스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의 연쇄적인 성학대 행위는 마치 연쇄살인범의 범행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많은 피해자들의 삶이 망가졌다는 뜻이다. 성직자는 아이들에게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는 그 신뢰를 범죄의 도구로 이용했다.
■ 13명의 극단적 선택,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최소 13명의 피해자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다.
열세 명.
그들은 가해자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학대는 사건이 끝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죄책감, 수치심, 트라우마는 피해자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이 숫자는 벨기에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성직자 성범죄가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브뤼헤 교구 로저 반헬루웨 주교 사건
조직적 은폐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는 브뤼헤 교구의 로저 반헬루웨 주교 사건이다.
반헬루웨는 사제이자 주교로 재직하던 기간 동안 친족인 조카를 수년에 걸쳐 성적으로 학대했다. 그는 2010년 4월 말, 이 사실을 시인하며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벨기에 가톨릭 역사상 최고위 성직자의 첫 공개 성추문이었다.
그러나 사임의 배경에는 충격적인 녹취 파일이 있었다.
■ 2010년 녹취록 폭로… “조용히 기다리라”
2010년 4월 초, 피해자인 조카는 당시 브뤼셀 대교구장이었던 고드프리드 다넬스 추기경과 면담했다. 그는 이 대화를 몰래 녹음했다.
그해 8월 말, 벨기에 언론을 통해 이 녹취록이 공개됐다.
녹취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다넬스 추기경은 피해자에게 “주교님이 내년에 은퇴하실 테니 조용히 기다리라”는 취지로 말했다. 세상에 알리지 말고 내부에서 덮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사과를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을 진창에 끌고 들어가지 말라”
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 것이다.
이에 대해 피해자는 울분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야말로 제가 5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제 삶 전체를 진창에 끌고 들어간 장본인인데도, 왜 교회는 가해자인 그 사람의 편만 드느냐!”
이 외침은 벨기에 사회를 뒤흔들었다. 결국 반헬루웨 주교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 1983년 사건, 묵살된 구조
이 사건은 개인 일탈이 아니었다.
위원회 보고서에는 1983년, 17세 여성이 사제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뒤 교구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는 증언이 담겨 있다.
피해자의 절규는 외면되었다.
벨기에뿐 아니라 아일랜드, 독일 등에서도 유사한 은폐 사건이 드러났다. 여러 주교들이 사임했다.
문제는 구조적이었다.
■ 2010년 6월, 압수수색과 바티칸의 반발
2010년 6월, 벨기에 사법당국은 교회 시설과 위원회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해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토 16세는 “충격적이고 개탄스럽다”며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교황청은 이를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라고 항의했다.
결과적으로 아드리안센스 위원회는 475건의 피해 자료를 압수당하고 사실상 활동이 중단됐다.
벨기에 사법부는 분명히 말했다.
“사건을 조사하고 처벌할 권한은 교회가 아니라 사법당국에 있다.”
교회 내부 조사로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는 계속됐다.
■ 체면을 우선한 교회
한 교회법 전문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교회는 많은 사례에서 피해자들의 운명보다 자신의 체면을 더 중시해 왔다.”
이 말은 벨기에 사례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들의 삶이 무너졌는데도, 일부 지도자들은 조직의 명예를 먼저 걱정했다. 침묵은 2차 가해였다.
벨기에 가톨릭 교회는 뒤늦게 공식 사과하고 “제로 톨러런스”를 약속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희생이 뒤따른 뒤였다.
■ 한국 사회에 주는 경고
이 사건은 벨기에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위적인 조직일수록 내부 문제를 숨기려 한다. 종교, 학교, 군대, 직장 어디에서나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어떤 성직자도 법과 윤리 위에 설 수 없다.
어떤 조직도 명예를 이유로 범죄를 덮을 수 없다.
피해자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구조, 가해자가 지위와 상관없이 처벌받는 사회만이 건강하다.
벨기에 피해자들의 눈물은 우리에게 묻는다.
침묵할 것인가, 바로잡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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