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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뉴스

“거룩함 뒤에 숨은 권력: 괌 대주교 아푸론 사건이 드러낸 교회의 민낯”

괌(Guam)에서 수십 년간 ‘영적 지도자’로 군림했던 한 대주교가 결국 교황청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판결은 정의라 부르기엔 부족했다. 사건의 주인공은 괌 아가냐 대교구의 전 대주교 Anthony Apuron(앤서니 아푸론)이다. 그는 미성년자 성학대 혐의로 교황청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었지만, 완전한 사제직 박탈은 피했다. 피해자와 시민사회가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앤서니 아푸론 대주교 ( 출처- 괌 아가냐 가톨릭 대교구  )

40년간 묻혀 있던 진실

아푸론은 1986년부터 괌 아가냐 대교구 대주교로 재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지역 사회에서 그는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외피 뒤에는 끔찍한 범죄 의혹이 숨겨져 있었다.

문제의 범행은 1970년대, 그가 본당 사제로 활동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소년을 상대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증언이 뒤늦게 세상에 나왔다.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성인이 될 때까지 침묵해야 했다. 당시 괌의 법은 미성년자 성폭력에 대한 공소시효가 짧아, 피해자가 21세를 넘기면 가해자를 형사 고소할 수조차 없었다. 교회는 이 법적 허점을 방패처럼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무려 40년 가까이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는 사제를 고발한다는 것은, 어린 피해자들에게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2014년, 드러난 의혹과 교회의 대응

2014년, 피해자들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러나 교구의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교구는 “피해자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며 조사를 거부했고, 아푸론은 오히려 명예훼손 소송을 거론하며 반격했다.

그는 내부에서 성폭력 대처 방안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자 해당 인사를 직무에서 배제했다. 평신도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자 그들을 “교회를 분열시키는 금지 단체”로 몰아붙였다. 비판은 곧 ‘반교회적 행위’로 낙인찍혔다. 권위는 방패가 되었고, 피해자는 다시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추가 피해 의혹도 이어졌다. 하지만 교회는 책임 인정 대신 부인과 침묵을 택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 방어 본능이 작동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왔다.

바티칸의 개입과 교회법 재판

사태가 국제적 문제로 확산되자 교황청이 움직였다. Pope Francis(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6월 아푸론을 직무 정지시키고 임시 교구장을 파견했다.

이후 교황청 신앙교리성 산하 교회법 재판부가 비공개 재판을 진행했다. 그리고 2018년 3월, 일부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며 아푸론을 대주교직에서 해임했다.

아푸론은 항소했지만, 2019년 2월 최종심에서 기각되었고 2019년 4월 판결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교회법상 더 이상의 소송은 불가능해졌다. 그의 유죄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남겨진 ‘성직’ 신분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교황청은 아푸론을 대주교직에서 면직하고 괌 교구 내 거주를 영구히 금지했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환속시키지는 않았다. 즉, 성직 신분은 형식상 유지된 것이다.

피해자 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처벌이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볍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아푸론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다른 사제들의 범행까지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는 상황에서, 단순 면직만으로는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푸론 본인의 태도였다. 그는 판결 이후에도 무죄를 주장하며 “내가 성직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은 것이야말로 결백의 증거”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피해자들에게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남겼다.

권위의 악용, 그리고 구조적 문제

이 사건은 단지 한 사람의 타락을 넘어선다. 대주교라는 지위, 사제라는 상징적 권위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자들의 신뢰와 존경은 범죄의 은폐 수단이 되었다.

최근 수십 년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가톨릭 성직자 성범죄가 잇따라 폭로되며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크게 흔들렸다. 이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권력자들이 서로를 감싸고 조직의 명예를 우선할 때, 피해자는 고립된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도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권위에 눌려 침묵하는 문화, 조직의 체면을 위해 진실을 덮는 관행은 어디에서나 반복될 수 있다. 종교 단체뿐 아니라 학교, 군대, 기업 등 모든 조직이 예외가 아니다.

성직자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어떠한 성역도 피해자의 고통보다 우선할 수 없다.

괌 대주교 사건은 분명히 말한다. 거룩함이라는 이름이 범죄를 가릴 수는 없다. 정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미온적 조치가 아니라 철저한 책임 인정과 투명한 개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아푸론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